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입학 학력고사 (문단 편집) === 1988~1993학년도 === 1988학년도에 대학별 논술은 2년만에 폐지하면서 '''선지원 후시험'''제로 개편했고 주관식이 추가되었다. 선지원 후시험제로 바꾼 이유는 지나친 눈치 작전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자 정부가 해결책이랍시고 내놓았던 것인데, 오히려 막판 눈치 작전은 더욱 심화됐고 결국 애꿎은 학생들만 피해를 봤다. 학과 지원자가 입학 정원에 미달해 '''경쟁률이 1 이하인 경우 나중에 받을 학력고사 점수와 관계없이 사실상 자동 합격'''되지만, 경쟁률이 높을 경우 기본적으로 불리한데다 '''선지원 후시험'''의 특성으로 인해 실제 점수에 따른 하향ㅍ지원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모의고사 성적 등만을 지원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어, 수험생의 시험 전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잘 모르겠다면 '''자기 점수를 모르고 지원부터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지금 수능 끝나고 [[원서 영역]]이니 뭐니 하면서 눈치를 보는 일이 많은데 지금은 적어도 자기 점수를 알고 지원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대입 수험생 입장에서 이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입시 제도'''로 불리운다. 자신의 객관적인 실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모의고사 점수나 내신 성적 등의 '감'에 의해 대학 지원 후 학력고사를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의고사 전국 1등, 수학, 과학 올림피아드 한국 대표 등의, 지금 같으면 수능 0.0x%대의 극상위권 수험생도 시험 당일 컨디션 난조가 있으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시도 없었고 복수지원도 없었던 시기라서 전기에 단 '''1회'''의 지원이 실패하는 경우 피해가 꽤 컸다.[* 특히 이런 식으로 떨어지면 멘탈이 약한 학생은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재수, 삼수해서도 시험 당일 컨디션이 흐트러진다. 전교 1등, 지금 같으면 [[SKY(대학교)|SKY]]급 대학에 수시로 충분히 붙고도 남을 학생이 계속 떨어져 3수 후 후기 분할 모집에 광-명-상-가급 대학을 가는 예도 흔했다. 자기보다 실력 떨어지고 나이도 어린 선배에게 [[학번제|존대말 해야 되는것]]은 덤. 거기다 광명상가급 인서울 중하위권 대학들의 경우 1980년대에는 과장 좀 보태서 지방대 취급을 받을 정도로 인지도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여담으로 당시에는 3수 해서도 대학을 못 가면 바로 입영 영장 날아오고 30개월 군생활을 하는 동안 두뇌가 포맷된 상태에서 다시 입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아무 대학이라도 가야 해서 후기 모집에 자신의 성적보다 훨씬 낮춰서 지망해야 했다. 후기 대학 또한 선지망 후시험이기 때문이다. 부차적인 것으로 최대한 정확한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모의고사를 여러 번 치게 되는데, 심한 경우 10월 한 달 동안 '배치고사'라는 이름으로 최대 10회의 시험을 치게 되어 스트레스가 심했다.] 실제로 선지원 후시험이 처음 시행된 1988년 최상위 수험생이 대거 탈락하는 바람에 이들이 재수를 한 1989년에는 전국 수석과 [[서울대학교]] 자연계 수석, [[고려대학교]], [[포항공과대학교]], [[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등의 수석을 재수생이 석권하였다. 학력고사 역사상 재수생이 전국 수석을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게다가 이 시기 수험생들은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4년생)로 100만 명의 입시 경쟁을 뚫어야 하는 그야말로 입시 지옥이었다. 또한 수험생은 늘었는데 하필이면 동시기 [[졸업정원제]]까지 폐지되어 입학 정원이 크게 감소한 탓까지 더해졌다. 또한 선지원 후시험으로 인해 시험 관리를 지금처럼 평가원 등의 공공기관이 아닌 지원한 대학교에서 모두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OMR 카드에 기재하는 선다형 문제 외에 직접 시험지에 답안을 문장으로 작성하는 단답형, 서술형 문제도 있었고 당연 이들의 채점 또한 해당 대학에서 했다. 따라서 채점자가 서술형 답안 조작을 통한 '''입시 부정'''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 입시 부정까지는 아니어도 라이벌 대학에 비해 자기 대학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학과간 커트라인을 조작해 발표한다든가,[* 대놓고 뻥 점수를 기재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서술형 답안 채점을 후하게 해서 지원자 모두의 점수를 올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아예 커트라인 발표 자체를 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었으며, 수험생 자신도 합격/불합격 관계 없이 몇점 맞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 같으면 커트라인 발표를 하지 않더라도 합격/불합격한 지원자들의 수능 점수를 통해 대략의 커트라인을 추정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그게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 당시 학원가에서 돌던 말은 [[국립대]]는 감사도 있고 다들 자기 지역에서 최고라서 굳이 속이지는 않지만 사립대학들은 비슷한 라인의 경쟁 대학보다 점수가 높게 나오도록 하려고 커트라인 뻥튀기를 해서 다 믿을 수 없다는 것.[* 1989학년도 [[포항공과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발표된''' 공대 커트라인은 고려대학교 쪽이 10점가까이 높게 나왔다.] 그때는 [[배치표]]에 좋게 나오게 하기 위해 대형 입시학원에 로비까지 하던 시절이라 이러한 입시 시스템은 지원할 대학의 과년도 커트라인 파악이 어려워서 선지원을 하려 해도 어디를 지원할지조차 알기 어려웠으며, 이는 비슷한 점수대의 대학이 여럿 모여 있는 인서울 중위권에서 더욱 문제가 되었다. 적당한 모의고사 점수대 가지고 배치표상 적절하게 지원하고 당일 시험도 비슷하게 봤으나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장학생으로 붙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 여러 이유로 비슷한 라인의 대학들에서 점수 편차가 크게 날 수 있었으며, 뻥튀기 채점으로도 극복 못할 정도로 점수가 크게 떨어진 대학은 '''아예 커트라인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눈치 작전은 더더욱 심해졌다. 교내 학과 선택은 물론이거니와 '''학교간''' 선택 눈치 작전까지. 온 가족이 지원 예정인 몇개 대학에 직접 가서 경쟁률을 확인하고 공중전화 찾아 전화하는 쇼를 했던 시기가 그때였다. 이때 유행한 신조어가 "고득점 재수생". 즉 체력장 포함 300점 이상을 받고도 [[서울대]] 등에 합격하지 못하고 재수하게 된 인원이 3자릿수(혹은 4자리수)로 폭증하는 현상이 시작됐다.[* 도미노 식으로 선배 학년이 한 학년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이 즈음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 [[영심이]]에서, 영심이의 큰오빠가 높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재수생으로 살고 있는 이유다.]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 대형 입시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이러한 문전성시 탓에 당시 유명 재수학원 같으면 이른바 재수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입학시험을 치르고 여기에 합격해야 입학할 정도였다. 게다가 몇몇 학원은 분기별로 편입(?) 시험을 봐서 결원을 보충하는데 이 편입 시험 경쟁 또한 치열했다.] 또한 수도권 곳곳에 기숙형 입시학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긴 시절이 이때이며 노량진의 단과, 종합반 입시 학원가가 더욱 커지게 된 계기가 이 때이다.[* 이렇게 커진 입시 학원가는 1994년 수능제도 이후 특차, 정시 복수지원 등 다양한 지망 방법으로 인해 고득점 재수생 수가 급감, 축소가 불가피했고, 부족한 수요를 메우기 위해 재수학원만 했던 대형 학원들이 '''재학생 대상 학원사업'''으로 사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노량진의 입시 학원가는 이후 취업 학원가로 바뀌게 된다.] 이때에는 전기 모집하는 전기대와 후기 모집하는 후기대가 구분돼 있었는데, 국립대는 대부분 전기대였고 학교에 따라서는 정원을 쪼개 전기와 후기 분할 모집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 때에는 학교간 복수지원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단일 학교에서 1, 2, 3지망 등으로 지원을 받았다. 햑교마다 약간 다르긴 했지만 대개 1지망 70/80%, 2지망 30/20%로 섞어서 2중 지망을 하고[* 정원이 100명인 학과라면 1지망에 지원한 학생들 중 성적순으로 70/80명을 뽑고 나머지 30/20명은 1지망 탈락자와 2지망으로 해당 학과를 선택한 학생을 섞어서 성적순으로 합격시켰다. 일반적으로 (그 대학의 최상위 학과를 빼고) 2지망으로 합격한 사람이 더 점수가 높았는데 대체로 하위 지망으로 갈수록 배치표상 아래의 학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학과 수석/차석 등 성적으로 장학금을 주는 경우는 지망순 관계 없이 무조건 성적순으로 주는 대학도 있고 오직 1지망으로 합격한 학생에 한해 장학금을 주는(즉 2지망 합격자는 점수 상관 없이 성적에 의한 장학금 대상 아님) 경우도 있었는데, 주로 [[본교]]/[[분교]] 혹은 [[이원화 캠퍼스]]의 경우가 후자에 해당되었다. 이런 경우도 단일 학교이기 때문에 1지망에 본교, 2지망에 분교 이렇게 지원이 가능하고 또 합격을 보장하기 위해 이렇게들 많이 했는데 당연 처음부터 분교를 넣은 1지망 합격자보다 본교 썼다가 떨어지고 2지망에 분교에 합격한 이들이 성적이 더 좋기 때문에 처음부터 해당 캠퍼스를 지망한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1지망 본교, 2지망 분교로 지원하여 2지망 합격한 경우의 과반수 이상은 [[반수]]를 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다.~~] 여기에서 다 탈락하면 3지망 학과에 결원이 생길 경우 성적 순에 따라 합격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